세상이 각박해질수록 허구세계는 함몰된 시간을 메우며 현실을 위로한다.

허구적 진실은 삶의 진실과 거짓, 타인과 나의 간극을 좁혀주기 때문이다. 현실의 불확실성은 공중그네처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반동을 주며 ‘연극’이라는 확실성의 세계로 치환된다. 그 안에는 한 땀 한 땀 공들인 홑겹의 가면으로 겹겹의 세상을 뒤집고 있는 이야기꾼이 있다. 가면 밖의 사실을 가면 속 진실로 끌어들이는 사람, 바로 연극계의 거장 오태석 연출가(75)이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무대와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는 그는 그야말로 ‘한국연극의 산 역사’다. 실력파 배우들의 산실이자 국내 유일의(아시아에서도 드문) 동인제 극단 ‘목화’를 30년째 이끌어 온 것도 그 투쟁의 증거이다. 이처럼 거칠고 뜨겁게 휘몰아치는 대가의 숨결을 찾아 대학로에 위치한 극단 ‘목화’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날도 어김없이 그는 연극 연습으로 분주한 일상의 조각들을 맞추고 있었다.

“아직까지 철들지 않아서 하고 있는 것 같아요(웃음). 매일 놀이터에서 어린 친구들과 허구에 빠져 살고 있으니까요. 동인제 극단은 기초예술이라 도저히 시간을 쪼개서 할 수 없어요. 오후 2시부터 막차 시간까지 온종일 허구세계에 있어야 하죠. 저는 거기에 현실이 개입되지 않도록 철저히 막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나쁜 놈이에요?(웃음). 그런데 참 안타까운 게…, 여기서는 경제적 보장을 장담할 수 없어서보통 35살쯤 되면 세상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어요. 그때까지 스스로 바나나는 바나나, 가지는 가지, 오이는 오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게끔 최대한 자기기량을 축적해 나가야 하죠.”

철들면 사라져버릴 신기루와 같은 허구세계에서 거듭 길을 물어온 노장의 연극쟁이는 현실의 모순에 근거해 온몸으로 미래를 투사해왔다. 결코 녹슬지 않으려는 창조적 열정과 서사적 욕망이 그를 철들지 못하게 붙잡아 둔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현실에 대한 두려움이 연극을 시작하게 만들었어요. 6.25때의 기억은 잠재적인 충격으로 남아있는데, 당시 경무대(現청와대) 법무관(일본 와세다大 법학전공)이셨던 아버지가 납북되셨기 때문이죠. 7월 중순, 인민군들이 남대문 근처의 저희 집으로 들이닥쳐서는 총을 들이대고 아버지를 지프차에 싣고 사라졌는데,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현실세계는 하루아침에 풍비박산 나서 뒤집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11살 어린 아이의 눈으로 직접 본 거예요. 그러면서 ‘맨살은 다치기 때문에 가면을 쓰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는 진실을 깨달았죠. 현실은 가짜고 허구가 진짜라고 믿기 시작했어요.”

그의 말대로 450년 전 셰익스피어가 잉태한 허구세계는 오늘날에도 허물어지지 않고 현실을 조명한다. 책의 세계는 그만큼 단단하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당대와 호흡하는 것이다. 그는 대학시절(연세대 3학년) 국립극장 장막극 당선작이자 데뷔작인 <영광>(1962)을 시작으로 1967년에는 <웨딩드레스>로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이듬해에는 국립극장·경향신문 공동 장막극 공모에 <환절기>가 당선되면서 일찌감치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이후 실험적인 연극형식과 언어가 빛나는 60여 편의 작품으로 파격과 실험, 생략과 비약의 연극문법을 구사하면서 전위적인 ‘한국식 연극’을 견인해 왔다. “연극으로 우리말을 보존하고 싶다”는 사명감은 그의 연극인생에 당위성을 부여하고 흔들리지 않는 좌표가 되었다.

“퇴장하려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붙잡아 헐은 곳은 깁고 빨고 다림질해서 살아있게 만들려고 했어요. 우리말을 훼손시키지 않고 올바로 전하는 것은 연출가뿐만 아니라 배우의 사명이기도 해요. 결이 고운 우리말을 보존하는 데 충실할수록 좋은 작품이에요. 그래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연극과 꼭 한번 만나야할 필요성이 있죠. ‘우리말 사랑’과 ‘위로’는 가감승제가 필요 없는 허구세계의 강력한 힘이니까요.”

막연하게 허구세계를 믿었던 아니 믿고 싶었던 어린 시절, 문필가를 꿈꾼 학창시절, 연극쟁이로 살아온 50년의 물리적 시간은 어느새 해체되고 현실의 삶은 둔탁한 공명음이 되었다.

“일본을 통해 서구연극이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볼거리, 만들기, 판소리 등 연희의 문화유산을 많이 남겼어요. 수십 년에 걸쳐 창작극과 번역극의 비율이 거의 5:5가 됐을 정도로 발전하긴 했지만, 문제는 기초예술의 어려움으로 기량 있는 배우가 나오기 힘든 구조에 있어요. 홍역을 치르듯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하는데, 6~70대까지 버텨낸 롤 모델이 없으니 연극은 단지 탤런트나 영화배우가 되기 위한 코스로 인식되고 있죠. 할머니가 담근 된장으로 끓인 국이 가장 맛깔날 수 있듯 연륜만으로도 연기의 설득력을 갖는, ‘그 사람 자체가 연기’인 배우가 절실해요. 저와 함께 늙어가는 배우 말이에요(웃음).”

그는 미분화된 세상일수록 허구를 갈망하기에 연극은 시대와 호흡하며 ‘우리 이야기’를 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31살에 혼자가 되신 어머니의 얄궂은 운명이, 근현대사의 모진 풍파를 경험한 할머니의 이야기가 가장 강렬한 창작의 원천이 될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덧붙였다. 키 작은 연필을 꾹꾹 눌러가며 지면위에 쏟아낸 누군가의 역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위로의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벚꽃 동산>을 예로 들면, 관객은 티켓을 구입한 순간부터 1900년대의 모스크바로 초대되는 거예요. 막 태어난 순간의 순수함으로 체홉의 세상에 빠지는 거죠. 현실에 찌든 ‘나’는 허구세계를 통과하여 깨끗이 씻기고 여유와 희망을 품고 현실로 돌아갈 수 있어요. 인간이 가진 수많은 감정의 밑바닥을 총체적으로 그린 연극으로 인생을 들여다본 셈이죠.”

극단 ‘목화’는 30주년을 기념하며 <자전거><백마강 달밤에> 등 대표 레퍼토리를 다시 무대에 올렸다. 오는 11월에는 2011년 8월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공식 초청되어 ‘헤럴드 에인절스’(최고작품상)를 수상한 한국식 <템페스트>가 뉴욕에서도 공연될 예정이다.

“우리의 100년 역사가 어두웠던 탓에 우리 것은 별거 아닌 걸로 치부되지만, 사실은 얼마나 소중하고 대단한지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요. 앞으로 단원 3~40명을 이끌고 10년 이상 더 할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죠. 이제 부터가 진짜 시작이니까요(웃음).”

명쾌한 음성, 명료한 발음에 실린 거장의 다짐에는 철들지 않은, 아니 철들지 않으려는 동심이 묻어났다. 어쩌면 그가 철들지 않았기에 한국연극이 이만큼 성장하고 철들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창작의 나이는 정도와 양을 정해놓고 흐름을 규정하며 시간을 재촉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연극이란 삶의 ‘태(態)’이자 끊어지지 않을 운명의 ‘태(胎)’가 아닐까.


글/사진. 김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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