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송경아’로 살아온 지도 벌써 15년.

나는 그동안 잡지 화보에서 비춰진 모습 그대로, 강한 이미지의 개성 있는 모델로서 대중에게 인식되어져 왔던 것 같다. 10대 후반에 처음 시작했던 모델이라는 직업은 보통의 평범한 여고생이었던 내게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체득할 수 있는 꿈 같은 기회를 주었고, 무엇보다 나만의 미학적 기준점을 만들어 준 고마운 배움터이기도 했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만약 내가 모델이라는 직업을 선택하지 않고 15년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아마 나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남들 사는 대로 수동적이고 평범한 15년을 보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이 적어도 10년은 투자해야 어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글귀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최고에 이르렀다는 건 동시에 더는 올라갈 곳이 없다는 의미를 지니기도 하는 것이기에 그 어느 때보다 위기와 불안에 처할 수 있는 양면적 순간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리라. 나에게도 5년 전, 그런 순간이 존재했었다. 많은 일을 하면서 정신없이 지냈지만 무언가 ‘빠졌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고 보이는 것에만 가치가 편중된 듯 보이는 모델 일에 염증을 느낀 시점이 분명 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 이상한 상실감은 소리 없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결국엔 이유 없는 무기력증과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매일 밤, 나를 괴롭힌 꼬리에 꼬리를 물던 수많은 생각들은 그동안 ‘모델 송경아’의 껍데기 속 어딘가에 내팽개쳐 두었던 ‘나’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해준 우연의 계기가 되었다. 모델 커리어를 쌓느라 바빴던 지난 10년 동안 미처 돌보지 못했던 내면적 결핍을 알아차리게 된 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사람에게는 어딘가에 집중할 때 가장 깨끗한 상태로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해지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그랬다는 뜻이다. 누가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어렸을 때부터 습관처럼 끄적거렸던 그림을 자연스럽게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그림을 그릴 때면 온종일 나를 붙잡고 있던 머리 아픈 고민들에서 벗어나 순수하게 그저 그림에 집중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누군가의 강요나 어떠한 목적도 없이 같은 일을 꽤 오랜 시간 반복해 왔다는 건 아마도 나만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그 일을 무척이나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림과 만나면서 비로소 느끼게 되었다.

 사실, 모델로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그림을 그린다는 건 ‘자신을 표현한다’는 의미에서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게 있어서 모델이라는 직업과 그림 그리는 행위는 내 안에 축적된 외적/내적 결핍을 충족시키는 일종의 통로였던 셈이다. ‘모델 송경아’로 어느 순간 보여지는 일에 염증을 느낄 때면 그림을 그리며 복잡한 내면을 게워내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조화로운 밀고 당김이 건강하고 균형 있는 삶을 영위하도록 지속시켜준 내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던 것이다.

 가끔 잡지나 방송 매체에서 인터뷰를 할 때면 “모델이라는 직업과 그림을 그리는 작업 중에 뭐가 더 본인에게 중요한가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종종 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도 모르게 난처한 표정을 짓게 되곤 하는데, 지금의 나에겐 그 어떤 것도 따로 생각할 수 없는, 내가 삶을 살아가는 방법 그 자체인 까닭이다. 그림과의 만남을 통해 나 자신이 모델이라는 직업을 얼마나 좋아하고 있었는지 온전히 체감하게 되었고, 또 그림을 그리며 얻은 마음의 평정은 모델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상의 원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에.

 “예술가란 언제나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자기 귀에 들려오는 것을 마음 한구석에 솔직하게 적어놓는 열성적인 노동자이다”라는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처럼, 어쩌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련의 모든 작업들이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줄곧 존재해왔던 또 다른 ‘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이리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몇 안 되는 행복한 사람이 된 것에 감사하며. 그리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가르쳐 준 모델이라는 직업과 그림이라는 작업, 이들과의 만남에 영원한 애정을 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