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가는 길

모든 삶은 축제다

인재진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총감독∙호원대학교 공연미디어학부 학부장

해마다 가을이 오면 가평 일대를 아름다운 재즈 선율로 물들이는 축제가 있다. 올해로 11회를 맞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누적 관객 수는 144만 명, 문화체육관광부가 선정한 대한민국 최우수축제로써 나날이 거듭나는 중이다. 자연과 사람, 음악을 하나 되게 하는 일상 속 ‘소풍’을 만들고 싶어 황무지에 축제를 심은 사람, 인재진 감독은 삶이야말로 최고의 라이브 무대니 그 거대한 축제를 즐길 때 자연스레 감동은 따라오는 법이라고 말한다. 오는 10월 3일부터 펼쳐질 사흘간의 재즈페스티벌을 앞두고 자라섬에서 그를 만나 보았다.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탄생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2003년, 지인의 부탁으로 한 신문사에서 주최한 문화기획 관련 강의를 하러 갔습니다. 그 당시 저는 재즈 페스티벌을 만들고 싶다는 꿈을 매일 같이 꾸고 있었기에 강의 주제 역시 페스티벌이었지요. 그로부터 얼마 뒤, 그날 강의에 참석했던 가평군 공무원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가평에서도 재즈 페스티벌을 할 수 있겠냐는 그의 물음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죠. “못할 게 뭐 있겠습니까?”

그러나 막상 후보지로 꼽힌 가평의 장소들은 페스티벌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서는데, 그가 또다시 결정적인 한 마디를 건네더군요. “비가 오면 잠기는 섬이 있는데요. 거기라도 한번 가보시겠어요?” 허허벌판 황무지, 그곳이 바로 자라섬이었습니다. 보자마자 거짓말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어요. 서울 인근에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지닌 섬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잠시, 무대와 객석으로 가득 차 있는 그림이 바로 그려졌어요. 자연과 사람, 음악이 하나 될 수 있는 페스티벌을 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곧장 판을 벌였습니다. 모두 제게 미쳤다고 했지요.

남들이 미쳤다고 하는 일을 밀어붙일 만큼 확신이 있었나 봅니다

자라섬과 유사한 해외 선진사례를 이미 접해본지라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여겼어요. 그때 저는 1천 회 이상의 공연을 무대에 올리며 유럽의 다양한 페스티벌을 직접 보아왔고, 그것을 진두지휘하는 감독들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많았거든요. 그렇기에 10년을 내다봤을 때, 분명 우리나라에도 페스티벌의 장이 열리리라 의심치 않았지요. 꽤 많은 실수와 실패를 경험한 사람만의 자신감이라고나 할까요?(웃음) 자라섬재즈센터 사훈이 ‘꾹 참자. 안되면 말고.’입니다. 확신을 가지고 참는 데까지 참아보지만, 그래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어요? 무슨 일이든지 때론 막다른 길을 만나기도 하고, 때론 새로운 길로의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전문가란 특정 분야, 자기 주제에 관해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실수를 이미 저지른 사람’이라고 물리학자 닐스 보어가 말했다지요. 실수하고 실패 좀 하면 어때요? 돈 주고 살 수 없는 경험이고 자산인걸요. 안 되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에요. 저는 하고 싶은 일이라면 무조건 부딪혀보고, 시도하는 것에 익숙해요. 그러다 보니 주변에 민폐를 좀 끼치긴 하지만, 시도조차 안 하는 예측 가능한 인생보다는 훨씬 즐겁습니다.

가평 지역주민들이 페스티벌의 든든한 외인구단이라면서요?

2004년 9월 10일, ‘자연, 가족, 휴식 그리고 음악’이라는 주제로 축제의 막이 올랐습니다. 폭우로 무대가 잠기고, 환불을 요청하는 관객들의 비난 섞인 아우성 속에 첫 번째 페스티벌은 아수라장이었지요. 아무도 이 행사가 성공할 거라 믿지 않았다고 해요. 심지어 저한테 돈을 꿔주고 투자한 가평군 공무원조차도요.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의 가평 읍내는 그야말로 ‘재즈’ 천지예요. 재즈 버거, 재즈 헤어, 재즈 막걸리, 재즈 벽화, 70대 밭매는 할머니조차 재즈 이야기를 하지요. 어느새 지역 주민들에게 재즈는 삶의 활기가 되었습니다. 지난 페스티벌 때는 지역의 상가 번영회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가평의 특성을 살린 먹거리 개발을 시도해 잣 피자, 잣 국수, 잣 새우튀김 등을 선보이기도 했어요. 지역주민들과 함께 만드는 축제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데 의미가 큽니다. 축제를 위해서는 반드시 지역 사람들과 소통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려면 그 지역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를 포함한 자라섬재즈센터의 모든 직원은 가평군 주민이에요. 가평에 살 것을 전제조건으로 직원을 뽑거든요. 가끔 서울에서 나를 찾아온 지인들이 집을 찾지 못해 동네 어르신들께 물으면 반응은 하나같이 똑같아요. “아, 그 째즈 하는 사람!”

허허벌판 황무지에 세운 축제의 성공 요인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재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도 부담 없이, 선입견 없이 맘 놓고 놀다 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을 ‘소풍’이라 말해요. 재즈는커녕 음표 하나 모른다는 사람도 가족, 연인, 친구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려고 찾아오거든요. 그 시간에 음악은 곁들여질 뿐이에요. 소풍 왔다가 우연히 들은 재즈에 관심이 생긴다면, 그것이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의 교육적 기능이 된다고 봅니다.

10년 넘게 재즈페스티벌을 진행하면서 느낀 것은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다른 사람들과 즐겁게 공유할 수 있고, 그 속에서 스스로 즐거워야 좋은 공연 문화가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공연기획자는 사회의 보편적 가치에 반하지 않는 공동의 목적을 위해 이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즐거울 수 있는 놀이의 장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티스트와 관객의 소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대 뒤편의 스태프와 지역주민까지도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지요. 무대를 사이에 두고 스태프의 에너지가 아티스트를 거쳐 관객에게 전달되면, 객석의 달아오른 뜨거움이 또다시 아티스트를 통과해 스태프와 지역주민에게 돌아옵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좋은 놀이 문화의 흐름이에요.

책 「청춘은 찌글찌글한 축제다」 에는 어떤 이야기를 담았나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수업하다 보면 ‘아이고, 이 녀석들 앞으로 어떻게 사나!’ 싶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저 역시 참 찌글찌글하게 살아왔거든요. 7년간 신용불량자로 전기가 끊긴 집에서 촛불을 켜놓고 살았고, 빚 때문에 어머니 명의의 집도 팔았고,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3회 때까지 어마어마한 부채로 스태프들에게 1년 넘게 급여를 지급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죠.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제 경험이 도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지난해 페스티벌을 마친 겨울 두 달 동안 폭풍 집필한 책이에요. 책 머리글에 보면 ‘찌글찌글했던 나의 인생에서 물음표를 빼면 아무것도 아닌 게 된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던 것도 아니었고,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시절, 나는 수많은 물음표와 싸워야 했다. 젊음은 이러한 질문과 싸워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썼어요. 돌이켜보면 구질구질하고 더럽고 치사해도 삶은 축제예요. 꾹 참고 열심히 살다 보면, 나중에는 자기만의 자양분이 되어 소중한 자산이 되더라고요. 지금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순간도 내 인생 최고의 날이자 축제의 현장인 거죠. 저는 하루하루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마음가짐이 굉장히 중요한 사람입니다. 삶은 최고의 라이브 무대고, 우리 모두 자기 삶의 총감독이며 또한 아티스트가 아닐는지요.

아내가 세계적인 재즈 보컬 나윤선 씨입니다. 특별한 외조가 있을 것 같은데요?

아내는 공연 때문에 해외에 나가 있는 시간이 1년 중 7개월쯤 됩니다. 오랫동안 매일 같이 공연을 해왔던 사람조차도 무대에 오르기 전엔 항상 떨리고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 당연해요. 더욱이 투어 공연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지요. 그렇기에 혹여나 오래 집을 비운다는 미안함이 들지 않게, 아내로서의 부담감 없이 아티스트로서 당당히 다녀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아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고,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가까이에서 마음을 헤아려주는 것만큼 제가 잘하는 외조도 없을 거예요. 많은 사람이 제 인생을 ‘before 자라섬 after 자라섬’이라 말하지만, 정확히 따지자면 ‘before 나윤선 after 나윤선’이겠지요. 아내를 만나기 전에는 굉장히 불안정한 사람이었는데, 지혜롭고 배려심 강한 아내를 통해 비로소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었거든요.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겠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그런 행운이 내게 다시 찾아올 것 같지 않다고 말해요. 아내 같은 사람을 제가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결혼한 지 5년이 되었는데도 늘 공항에 마중 나갈 때마다 가슴 뛰고 설레지요. 그 순간을 놓치기 싫으니까 늘 제가 나갑니다. 닭살이어도 어쩔 수 없어요.(웃음)

인생 축제 제2막 장은 어떻게 펼쳐질까요?

가평으로 이사 온 지 9년째에 접어듭니다. 이제껏 살면서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딱 3가지 있는데, 첫째는 아내와 결혼한 일, 둘째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을 만든 일, 셋째가 바로 가평으로 이사와 사는 삶이에요. 자연과 가깝게 산다는 게 이토록 매력적인 줄 왜 진즉 몰랐을까 싶어요. 무엇보다 소박한 일상 속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이 커요.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20주년을 마치면 은퇴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많은 사람이 창의적인 작가들과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생활밀착형 공간을 마련하고 싶어요. 저는 그 안에서 요리해볼까 해요. 요리라는 게 참 매력적인 일이거든요. 누구든지 삶 속에서 자기만의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는 영역이잖아요. 요즘은 아침마다 텃밭의 토마토를 한 주먹씩 따서 냉장고 안에 있는 재료만 가지고 먹고 살기를 하는데, 재미가 쏠쏠해요. 아주 소소한 행복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