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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에티오피아에서 돌아왔을 때, 나를 기다리는 메일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오소희 작가님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저의 친척 동생이 시각장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작가님이 쓰신 아프리카 여행기 <하쿠나 마타타 우리 같이 춤출래?>를 꼭 읽고 싶어 하네요. 시각 장애우들은 점자로 나오지 않은 책을 접해볼 수 없는 실정입니다. 혹시, 이런 친구들이 작가님의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실 수 있나요?’
나는 답 메일을 썼다. ‘죄송하지만 현재 그 책이 점자 책이나 읽어주는 책으로 출판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평소 같았다면 그 정도에서 메일이 마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때 나는 에티오피아에서 막 돌아온 참이었다. 주머니 속 여행 수첩에는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 내게 선사해준 깨달음들이 적혀 있었다. ‘달려. 한 뼘이라도 달릴 여지가 있다면 땀을 내 더 달려. 그리고 그 한 뼘을 고스란히 나누어 가져’ 같은 말들이. 그래서 선뜻 덧붙였다. ‘대신 제가 가서 읽어줄게요.’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었다. 수빈과 희원,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시각장애 소년들. 만나 보니, 수빈은 큰 덩치에 진중했고 희원은 작고 유쾌했다. 우리는 첫 만남부터 서로를 좋아했다. 나는 주말마다 아이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구경한 저 먼 세상이나 문학과 음악에 대해서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은 아마 두 번째 만남이었을 것이다. 겨울이었다. 여섯 시가 되자 교실 밖에는 벌써 어둠이 내렸다. 이제 일어나 정리를 할 시간. 해야 할 일은, 블라인드를 내리고 책걸상을 정리하고 가방을 챙기고 불을 끄는 것. 그런데 아이들의 순서는 나와 달랐다. 수빈이가 ‘제일 먼저’ 불을 껐다. 깜깜한 어둠이 되었다. 그 속에서 수빈이가 익숙한 동작으로 블라인드를 내렸다. 희원이도 곧장 책걸상과 소지품을 정리했다. 나는 그저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아이들의 꼼꼼하고 차분한 동작을 기척으로만 느끼면서. 그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교실의 형광등이 나 혼자만을 위해 켜져 있었다는 걸.

어둠 속에서 아이들의 대화와 동작은 매우 자연스럽고도 능숙했다. 일순간 나아갈 곳을 모르고 어둠에 경직된 것은 나뿐이었다. 내내 이런 어둠이었겠구나. 뒤늦게 어리석은 생각이 많아진 것도 나뿐이었다.
나는 수빈의 엄마도, 희원의 엄마도 모두 만나보았다. 나도 명색이 엄마인지라, 이러한 순간을 최초로 맞닥뜨렸을 그녀들의 ‘그 저녁’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떠올랐다. 방문을 여니, 어둠에 잠긴 채 평화롭게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는 조그만 아이. 그 아이들을 이처럼 훌륭하게 키워내기까지 ‘어미’이기에 가능했을 반복과 열정…. 그녀들의 사랑과 아이들이 이룬 성과에 가슴 벅차서, 나는 머릿속 그림이 촉촉하게 마음을 적시도록 어둠 속 아이들의 움직임을 가만가만 느끼고 서 있었다.

잠시 후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이 교실 구석구석을 다 암기했겠구나. 그럼 새로운 공간에 가면 어떻게 하니?”
희원이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부딪히면서 배워요.”

일이 초간 숨이 멈췄다. 아, 그것참 멋진 말이로구나! 그때 나는 나이 사십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삶의 윤곽을 알아버린 것 같았고, 그만큼 세상은 덜 흥미로웠다. 나는 스스로 얼마나 모자란 존재인지를 잊고 있었다. 그래서 지구의 머나먼 끝까지 다녀와야 절절한 교훈 하나쯤 가슴에 심을 수 있었다. 아이들이 그런 내게 가르쳤다. 당신 바로 곁에 책상이 있어요. 부딪히면서 배워요. 배운다는 건 그런 거예요. 온몸을 내던지는 것.
그날 저녁, 알에서 깨어나듯, 나는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 아끼지 않을 것이다. 다가올 나의 중년엔 모름지기 더 부딪히고 더 배울 것이다. 어둠 속에서, 아이들 손을 잡고 긴 복도를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