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7월, 나는 스물여섯의 늦은 나이에 입대했다. 공무원 시험 준비하느라 입영을 몇 차례 연기한 탓에 남들보다 한참 늦어버렸다.
 논산훈련소에서 4주 교육을 마치고 대전, 서울을 거쳐 춘천의 103보충대에서 며칠 대기하다가 트럭에 올랐더니 홍천에서 내리라고 했다. 종착지는 사단사령부 내에 있는 통신부대였다. 아직은 햇볕이 따가운 9월 중순이었다. 무엇보다 나이 때문에 앞날이 험하겠구나 생각하며 나름 각오를 다졌다.
예상대로 40여 명의 내무반원 중에는 전역 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최고참 병장 한 사람만이 나와 동갑이었고 그 외에는 모두 나보다 어렸다. 그 중에는 나보다 며칠 먼저 도착한 신참 이병이 둘 있었다. 신○○ 이병과 김○○ 이병. 훈련소는 달랐지만 그 둘도 7월에 입대했기 때문에 우리 셋은 ‘7월 군번’이라 해서 동기로 분류되었다.
물론 나이로는 모두 동생뻘이었다. 이후 많은 날들의 고락을 함께했다. 주로 내가 소소한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당시만 해도 군에는 구타와 폭력이 심했으나 우리 부대에서는 두어 달 전에 큰 총기 사상 사고가 발생하여 단속을 철저히 한 관계로 구타 행위는 많이 없어진 상태였다.
나는 900 행정 주특기가 감안되어 대대 운용과(≒작전과) 사무실로 배치되었다. 헌데, 난감한 일이 생겼다. 바로 직속 고참인 신○○ 일병이 고등학교 한 해 후배임을 알게 된 것이다. 대체로 우리나라 고등학교 문화는 서로의 관계를 확인한 순간 선배는 후배에게 하대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여긴 일반 사회가 아니고 군대란 말이다 군대! 학교 후배라도 깍듯이 고참 대우를 해야 한다.
주변에 보는 눈도 많았다.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면 차라리 편했을지도 모른다. 후배인 신 일병으로서도 난감하기는 매 한가지였다. 겨우 졸병 하나 받아서 잡일도 시키면서 좀 편해지나 싶었는데, 고교 선배가 떡 들어왔으니 말이다. 나로서는 최대한 처신에 주의하면서 고참 대우를 해주려고 했지만 아마도 그의 마음은 여간 불편하지 않았으리라.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고 했던가. 어쨌든 고단했던 2년 좀 넘는 기간의 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제대를 했다. 고향은 다르지만 직장이 모두 서울이어서 그 후 지금까지도 30년 넘게 연락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물론 사회에서의 서열은 재정립되었다. 신 일병과의 관계도 고교 선배의 정상 위치를 회복하였고, 나이어린 동기 두 사람도 필자를 형님처럼 깍듯이(?) 대접하고 있다.    
우리가 만날 때면 그리 급한 사정도 없는데 앉자마자 10여 분 간 각자의 근황을 서둘러 물은 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느새 그 시절 군대 얘기로 돌아가곤 한다. 뭐 유별나게 고생을 많이 했다든가, 어느 악질 고참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든가, 아니면 흔히 하는 군대 축구 등의 얘기는 아니다.
가령 휴일에 빨래를 널 때 확성기에서 흘러나오던 김수희의 애절한 노래 <멍에>, 겨울 새벽 2시 보초 근무를 마치고 반합통에 끓여 먹었던 그 라면 맛, 신참들 군기잡기 좋아하는 목욕탕 담당 민○○ 병장의 심술로 비누거품도 제대로 씻지 못하고 마쳤던 벼락샤워, 일요일 오후 연병장의 잡초를 뽑으면서 때로는 몸으로 때우는 일이 마음이 훨씬 편하다고 주고받았던 위로, 모처럼 원주 군사령부 방문길에 횡성의 중국집에 들러 한 입에 후루룩 삼켰던 간짜장, 영점사격 불합격으로 수없이 반복했던 ‘좌로 굴러 우로 굴러’의 얼차려, 팀스피리트 훈련 참가 시 제천 어느 민가에서 얻어먹었던 흰쌀밥과 묵은 김장김치 등등.
물론 같이 근무했던 윗사람들에 대한 얘기도 빠트리지 않는다. 화가 나면 얼굴색이 불콰해졌던 운용과장 김 소령님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신사풍모의 홍 대위님은 어느 계급까지 승진했을까, 후덕했던 인사과의 최 중위님과 차트 글씨를 잘 썼던 박 하사님는 사회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소 까탈스럽던 김 병장님은 어떻게 변했을까, 보급관을 오래하셨던 김 준위님은 건강하신지 등등. 이야기는 돌고 돌면서 2시간을 넘겨도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매번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얘기지만 그저 가슴이 따뜻해져 온다.
‘제대 후에는 근무했던 부대 방향으로 소변도 보지 않는다’는 말에 공감도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편하게 만나고 있다. 자칫 인생에 공백이 될 수도 있었던 2년여의 경험을 공유하는 동료가 있음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우리에겐 군대가 때때로 생활에 활력을 주는 추억의 영양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야겠다. 이 글이 실리고 나면 넷이서 또 한 차례 1982년 9월로 돌아가 얘기꽃을 피울 것 같다.

*1956년 경상북도 군위 출생. 영남대학교 법학 학사. 기획재정부 FTA국내대책본부 본부장,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상임위원 등 역임. 저서로는 <일본의 신기업연금제도>(2002), <딸에게 힘이 되는 아빠의 직장 생활 안내서>(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