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악은 가장 직접적으로 감성을 전하는 이성의 틀이다.'

 이는 세월의 깊이만큼 인간을 담고 인간을 위로하는 음악을 빚어낸 작곡가 박파안영희(Younghi Pagh-Paan, 70)의 인생철학이자 음악론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이 ‘책상에 놓인 비파를 보며 생각한다’라는 뜻으로 붙여준 중간이름 ‘파안(琶案)’은 이를 뒷받침한다. 서울대 음대 작곡과를 거쳐 독일학술교류처(DAAD) 국비장학생으로 독일유학을 떠난(1974.6.3) 그녀는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클라우스 후버(Klaus Huber), 브라이언 퍼니호(Brian Ferneyhough)를 사사하며 음악적 성장을 이어갔다(스승 클라우스 후버와는 부부의 연을 맺는다). 윤이상을 잇는 세계적인 작곡가 박영희(前 독일 브레멘 국립예술대 부총장)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여성 및 동양인 최초 스위스 보스윌 세계작곡제 1위, 여성작곡가 최초 도나우에싱엔 현대음악제 오케스트라 위촉(관현악 ‘소리’ 발표), 동양인 최초 하이델베르크 여성예술가상 수상, 독일어권 최초의 음대 작곡과 교수를 비롯하여 ‘통합청주시 1호 명예시민’(7월 선정)까지, 반세기에 걸친 음악여정은 자신과의 투철한 싸움이었다.

“유학을 결심한 결정적인 사건이 있어요. 1972년, 당시 대학원생이었던 저에게 황병기 선생님께서 이화여대 육완순 무용가가 단군에 관한 무용극을 올리는데, 오케스트라곡을 맡아보라고 제안하셨어요. 다른 프로 작곡가들은 모두 거절했는데, 저만 자신만만하게 받아들였죠. 공연을 불과 2개월 남겨놓고 불가능은 생각조차 못한 거예요. ‘난 뭐든지 잘해, 무조건 할 수 있어’라는 교만이 화를 불렀죠. 결국 절반 밖에 못쓴 미완성으로 공연을 올린 처참한 상황을 피할 수 없었어요.”

그날의 충격으로 바닥까지 내려앉았지만 “반드시 공부해서 나를 바꿔야겠다”는 각오와 예술가로서의 진지한 태도를 결정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외롭고 힘든 유학시절을 이겨내고 세계적인 작곡가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 일을 되새기며 ‘이곳에 왜 왔는지, 왜 공부해야 하는지’를 되묻곤 했다. 이는 ‘철학’과 ‘사유하기’로 다져진 음악적 뿌리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작품의 이유가 명확해야 해요. 음악은 곧 철학이잖아요. 그래서 입학시험 때 수험자들에게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꼭 물어봐요. 물론 단순히 읽는 차원을 넘어 얼마나 내재화시키고 정신적으로 영글어졌는지가 더 중요하죠. 정신적 가치의 척도는 스스로 지녀야 하니까요. ‘정신적 앙가쥬망’(engagement, 실천·참여)이 우선이고, 음악이론이나 기법은 그 다음이죠. 음악은 이성과 감성의 조화니까요.”

그녀가 강조한 정신적 앙가쥬망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로서, 또 인간으로서의 실존과 동의어다. 스위스 보스윌 세계작곡제에서 1위로 선정된 것도(당시 콩쿠르 주제가 앙가쥬망이었음) 앙가쥬망을 사회(정치적)참여로 접근하지 않고 “자신의 실존을 인정하면서 존재 자체를 깨닫는 것”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다. 발상의 전환이자 새로운 해석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를 지탱하는 강인함, 음악의 힘은 여류적 감성에 함몰되지 않고 남성적 에너지로 전환되어 독특한 감성의 결을 보여준다. 여성성에 내재한 남성성, 그 역설관계는 균형과 조화의 언어를 지향하고 있다.

유학 6년 만에 세계적인 작곡가 대열에 설 수 있었던 창작의 근간에는 신화적 상상력과 동양철학에 굽이치는 한국적 정서가 내재되어 있다. 이를 서양음악이론으로 녹여낸 한국인의 의식은 독특한 음악문법과 음색을 만들어낸 것이다. “음악가도 진리 탐구자예요. 주류나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정신이 필요하죠. 60년대 중반 서울대 음대 시절 연극반에서 뵌 오태석 선생님으로부터 타협 없이 자신의 길을 향하는 예술가 정신을 배웠어요. 황병기 선생님은 국악정신과 음악정신을 가르쳐 주셨고요. 허난설헌의 삶과 문학으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곡도 썼는데, 저는 그녀를 신비주의자로 보고 있어요. 고통스러운 삶을 신선과 선녀들이 함께 노니는 모습으로 승화시켰잖아요. 비운의 현실을 극복한 힘이 존경스러워요.”

그녀는 6.25직후 걸인생활을 하며 해금을 연주하던 어느 거리의 악사, 저녁마다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자작곡을 불러주시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10살 때 세상을 떠나자 행여나 밝은 웃음을 잃을까봐 피아노를 가르쳐준 작은 언니까지 모두 최초의 음악선생님들이라고 했다.

“방과 후, 남몰래 담을 넘어 교실로 들어가서는 촛불에 의지하며 풍금을 치곤했어요. 종이로 만든 피아노 건반을 갖고 다니며 연습하기도 했고요. 주한미군방송(AFKN)을 벗 삼아 청음도 했는데, 사실 맞는지 틀린지 보다는 음을 기억하는 게 더 중요했죠. 학창시절 문학소녀일 정도로 글도 좋아했지만 제 감정을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음악이 더 적합하다는 생각에 작곡가를 꿈꿨어요. 이후 중3때 시민회관에서 공연한 안익태의 ‘코리아 판타지’가 결정적인 계기가 됐죠. 아직까지도 그 첫 음의 감동은 잊을 수 없어요.”
독일에서 역사적·사회적 변동을 목도하고, 고국의 변화를 멀리서 지켜본 그녀는 오래전 그날 만난 ‘코리아 판타지’의 음들을 마음으로 반복 재생하며 만남과 그리움의 대상들을 불러냈다. ‘소리’ ‘만남’ ‘편경’ ‘우물’ ‘님’ ‘비단실’ 등 한국어 제목들을 고집하는 것도 음악적 뿌리가 고국을 향해 있음을 말해준다. 어릴 적 유일한 음악청중이었던 아버지와 고향 청주의 부재, 그 빈자리는 새로운 만남들로 메워졌다. 초등학교 졸업식 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용기를 북돋아준 담임선생님, 한줄기 빛과 같은 믿음을 전해준 최양업 신부까지, 모든 인연들은 결핍의 공간을 채워나갔다.

“13살 때 처음으로 작곡한 ‘강아지’라는 곡이 기억나요. 강아지가 자기 꼬리를 물려고 뱅뱅 돈다는 내용의 동심 가득한 곡이었죠. 그때의 감성을 기억하며 클래식의 대중화를 위해 어린이를 위한 곡도 쓰려고요. 동요를 듣고 편안해지듯 제 음악을 만난 모든 이들의 마음이 정화됐으면 좋겠어요. 폭력이 난무한 세상에서 ‘청주시민의 노래’처럼 미약하나마 사회에 좋은 쓰임이 되고 싶어요.”

세계현대음악명예의전당 ‘파울 자허 재단’에는 그녀의 친필악보가 영구보관 돼 있다. 끊임없이 구상하며 시간을 구성하는 음악언어는 무위(無爲)의 실천을 꿈꾼다. “무위를 행동으로 옮기는 힘이 생겨서 타인을 이길 필요도 더 잘 날 이유도 없어졌다”는 그녀는 종심(從心)의 나이를 얼마만큼의 무게로 느끼고 있을까. 그저 ‘사랑을 실천하고자 했던 작곡가’ 정도면 존재의 흔적으로 충분하다는 작곡가 박영희. 그녀는 또 다른 만남, 현재의 소리를 건져낸다. 잔잔한 물결 아래 휘몰아치는 창조적 욕망과 창작에너지, 그 거대한 힘으로.


글. 사진/ 김신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