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대학교수로 부임한 이래 나는 초·중·고등학교 나아가 대학 교육에 걸쳐 학교교육에 철학 교육을 제도화하고 활성화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15년을 헤아리는 - 운동이라면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 이 철학 교육 운동을 해오면서 최근 들어 전혀 화합하기 힘든 두 가지 생각이 내 마음 안에 큰 갈등을 일으키게 되었다.
우선 이 기간 동안 비사범계 대학교수로서는 직접 체험하기 힘든 초·중·고등학교 교육 현장과 관련된 사안들을 다루면서 교육을 제대로 하려면 중·고등학교뿐만 아니라 초등학교에서도 철학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교육 현장에서 만난 많은 교육자들에게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와는 정반대로, 현재와 같은 교과 교육 체계 안에서 철학 교육을 제대로 실시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절망적인 생각 역시 희망이 강화되는 만큼이나 굳건하는 것이다.
과거 철학 교육에 대한 비호감과 잘될 철학 교육에 대한 불안
개인적으로 철학 교육 운동을 시작하던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교육행정 당국이나 일선 교사들 사이에서 철학 교육에 대한 반응은 거의 비호감 수준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대학 시절에 들었던 철학 개론 과목을 통해 철학이란 아주 어려운 개념과 명제로 가득 차 보통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난해한 강의였다는 안 좋은 추억을 공유했다. 그리고 당시까지 대학의 철학 교수들이 각기 나서서 만들었던 고등학교 철학 교재들은 대학 교양과정에서 접했던 그 난해한 철학 개론 책들의 요약판일 뿐이라는 그다지 틀리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철학 교과서는 철학사와 철학자들에 대한 또 다른 분야의 지식과 정보를 담은 책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철학 과목이 들어오면, 그렇지 않아도 배워야 할 교과 지식이 넘쳐 공부하기 버거운 학생들에게 공부 부담이 또 하나 늘어날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당시 철학 교육이 안고 있는 더 큰 문제는 단지 철학적 지식만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을 교육행정의 고위직 인사들의 말에서 알 수 있었다. 사적인 담화에서 이들은 철학 교육이 제대로 실시된다면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감당하기 더 힘든 문제가 교육 현장에서 발생하는 것을 우려했다. 즉 그들의 암묵적인 견해에 따르면 철학에서 제대로 가르칠 철학적 사고는 학생들에게 익숙해져 있는 사고방식이나 지식 정보 체계를 근본적으로 교란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학생들의 사고와 생활 과정을 통제해야 할 위치에 있는 교과 교사들이나 학교 당국이 학생들에게서 제기될 비판과 불만을 감당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철학 교육이 대한민국 학교교육에서 실시된다면 그것은 일종의 혁명에 해당되는 사건인데, 그런 상황을 내다보는 대한민국 교육부와 일선 학교의 운영자들이 학교에서 철학 교육을 일반화시키는 데 찬성할 리 만무하다는 것이었다.
도덕·윤리 교육의 정체성 회복과 재활성화를 위한 철학적 발상의 도입
2000년대 초입의 이런 상황에서 도덕 교사 임용 조건 문제를 놓고 한국 철학계와 당시 교육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을 때 일선 학교의 도덕·윤리 교육에 철학적 발상을 도입해야 한다는 철학계의 주장에 뜻밖에 동조하고 나섰던 이들은 교육 현장에서 실제로 도덕 교육을 하고 있던 상당수의 일선 교사들이었다. 이러면서 진행되었던 도덕·윤리 교육의 현장 점검에서 심각한 문제점들이 밝혀졌다. 요약하자면 대한민국 학교에서 실시하는 도덕·윤리 교육은 도덕·윤리 교육으로서의 정체성이 현격하게 부족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학생들의 도덕의식이나 도덕적 실천 능력의 배양에 별달리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학생 개개인을,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자유롭고 책임성 있는 주체적 개인으로 성숙시키면서 도덕의식을 내면화시키려고 한다면 정해진 덕목들을 주입식으로 학습시키고 시험 문제로 평가하는 기존의 교과 교육 방식으로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의식이 현장 도덕·윤리 교사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이들 가운데 도덕 교육을 도덕 교육답게 다시 활성화시키는 데 관심 있는 이들은 도덕·윤리가 본래 다루어진 근원인 철학에서 교육적 활력을 재충전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한국 도덕·윤리 교육백서》, 홍윤기 책임 편집, 전국철학교육자연대회의 펴냄, 2001 참조)
하지만 이렇게 난조에 빠진 도덕·윤리 교육에 교육적 활력을 다시 충전하려던 시도는 국민의 정부나 참여정부 시절에는 교육 관료와 교사 양성 체계에 포진하고 있던 도덕·윤리 교육계 기득권 세력의 교묘한 방해와 일선 도덕 교사 대다수의 방관으로 사실상 실패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역대 민주정부의 교육적 관심 사안에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 상태에서 MB정부가 들어서자 참으로 뜻밖에 학교의 도덕·윤리 교육에 생각지도 못했던 교과 조정의 칼이 들어갔다. 그동안의 도덕·윤리 교과가 사회 교과의 내용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는 데 주목한 MB정부의 교육 실세들은 학생들의 학습 부담을 줄여 주는 가장 좋은 방책으로 도덕·윤리 교과를 지목하고 이들을 독립 교과에서 사회 교과로 편입시켰다. 철학계와 일선 도덕 교사들이 우려했던 도덕·윤리 교과의 정체성 위기는 이렇게 도덕·윤리 교과의 독립성 소멸로 귀결되고 말았다.
생활교육과 교과 교육의 발화점으로서 철학 교육, 무엇을?
교육과정이 수시 개정으로 바뀐 2007년부터 2011년 개정안이 추진되는 시기까지 몇 년 동안 소강상태에 들어가 있던 철학 교육에 대한 관심은 경기도교육청에서 혁신 교육정책을 표방하고 ‘창의지성 교육’ 을 제기한 2011년 말부터 뜻밖의 도약기에 들어갔다. 이때 철학 교육에 제기된 요구는, 이제 사회 교과의 하나로 소멸해 버린 도덕 교육을 대신하는 수준이 아니라 학교 안의 학생들에 대한 생활교육과 교과 교육 전반에 걸쳐 ‘창의지성의 기풍을 진작할 일종의 교육적 발화점發火點을 마련’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런 교육의 매체로서 일차적으로 2012년과 2013년에 걸쳐 중학교와 고등학교, 그리고 최종적으로 2014년에는 초등학교용 철학 교과서의 제작을 주문했다.
한국철학교육학회의 현장 교사 회원들이 대거 참여해 만든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철학 교과서가 나왔을 때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엇갈렸다. 우선 이 교과서들의 목차와 도입 예화를 본 이들은 한결같이 철학 교과서가 이런 주제와 내용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그것들은 한결같이 성장기 청소년들이 생활과 교과 공부에서 접할 전형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다루었으며, 그 어떤 선행 학습의 부담 없이 당장 그 자리에서 이해할 수 있는 소재들이었다.
생활교육과 교과 교육의 의식 도약대로서 철학 교육, 어떻게?
이 철학 교과서가 상정하고 있던 철학은 철학사나 철학가에서 나온 철학적 지식의 학습이 아니다. 여기에서 철학이란 자기 삶과 알고 있는 지식에서 나온 고민스러운 문제, 즉 자기 내면에서 자기를 미치도록 하는 여러 문제들의 도전에 직면한 상태에서 그것을 꺼내 서로 비교해 보면서 캄캄한 각자의 마음에서 벗어나도록 자기 내면의 캄캄함을 비추는 빛이 자체적으로 나오도록(발광發光) 하는 철학적 실천, 즉 ‘실제로 철학 함’ 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철학에서 역사적으로 계발해 온 능력, 철학 능력을 성장기의 아이들에게 실제적으로 활용하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이기도 한데, 이 과정에서 교사가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아이들이 실제 철학 함에 참여하도록 교실 분위기를 고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 함은 교관의 구령에 따라 지시된 행동을 한 치의 빈틈없이 행하는 군사훈련이 아니라, 선생님의 선창에 따라 마당 한가운데로 다 같이 뛰어나와 결국은 선생님과 학생들이 신 나게 같이 어울리도록 벌어진 춤판과 유사하다. 그래서 철학 함의 시작은 그 어떤 탁월한 생각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대해 먼저 다 같이 입을 여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분위기에 따라 쏟아지는, 아니면 침묵되는, 응답의 내용이 각 학교에 따라 학교 안에서도 교실에 따라 그리고 교실 안에서도 학생 개개인의 사정과 개성에 따라 절대 동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 수업에서 기대되는 것은 절대 누가 봐도 만점을 보장하는 정답正答이 아니라 각자 자기가 본 응답應答들을 바탕으로 같은 교실 안에서 서로 나누어 모은 응집凝集된 보편지普遍知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 교실에서 학급 학생들이 모두 합의하는 전체적 동의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편지는 결코 전체를 모두 똑같이 규제하여 서로 다른 점을 없애 버린 획일적인 동일지同一知가 아니라 서로의 차이差異들을 빠짐없이 연접시킨 일종의 연대 지혜連帶 知慧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지혜에는 반 안에 있는 교사와 학생들의 아직은 미성숙한 의견들뿐만 아니라 그 쟁점에 관해 철학사의 위인들이 당장의 교사나 학생들과 같은 위치에서 생각한 의견들도 같이 어우러진다.
이 과정에서 교사가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응답들이 응집되어 보편지를 이루는 과정을 그 창발자의 이름과 함께 ‘기록’하여 그 교실의 중요한 정신 체험으로 기억시킨 뒤 적절한 시점에 각자의 응답과 교실의 보편지를 ‘논변 형식’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교실에서 각 아이들은 자기 발언과 공동 결론의 수행자로서 기억된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선생님이 항상 자신과 함께했다는 것을 마음에 간직하는 ‘지적 동반 의식’을 경험할 것이다. 학생들은 자기가 한 말이 누군가에 의해 기억되었다가 인용된다는 것을 보며 자신이 혼자 공부하거나 생활한다는 고립감에서 벗어날 것이며, 누군가로부터 특히 교사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함으로써 ‘자존감自尊感’을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누군가와 더불어 자신의 삶과 앎을 가꾸어 간다는 것은 인간적 성숙의 가장 중요한 단계이며, 무엇보다 학교에서 ‘배우는’ 생활 방식과 교과 지식을 ‘자기 것으로 되돌려 받는’ 과정이다. 따라서 철학 교육은 교과별로 분산되어 학생들에게 연관 없이 강요되는 판에 박힌 교과 지식들과 캄캄한 어둠 속에 내동댕이쳐진 삶의 고민들을 학생들의 삶의 과정과 전인적으로 연관시켜 학생들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주는 완전 학습의 최종판에 다름 아니다.
철학 교육에의 기대 - 교육 그 자체의 완성
철학 교육 안에서는 일반 교과 교육에서 벌어진 성적에 따른 차별이 일단은 없어져야 할 것이다. 위의 교과서들의 취지에 충실하게 수업을 실연해 보았던 어떤 이에 따르면 철학 수업 때 가장 좋았던 것은 일단 반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와 ‘공부 못하는 아이’의 차이가 없어지는 경험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실의 분위기에 따라 아예 발언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아니면 전혀 엉뚱한 얘기가 나와 이른바 수업 분위기를 망친다고 생각되는 상황이 조성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철학을 끌어온 철학사의 선도자들에게는 원칙적으로 분위기 망친 수업은 있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분위기가 망쳐졌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계기가 도리어 철학 함의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망쳐진 계기라는 것 가운데 그 자리와 연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또한 아이들이 ‘완전히’ 침묵하는 상태라고 하더라도 아이에게 그 침묵의 뜻을 물어본다면 어떤 형태로든 응답은 나오게 되어 있다.
이렇게 하여 철학 교육은 그 응답, 응집의 단계를 거치면서 더욱 발전된 의견을 가지게 된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발언과 교류를 통해 획득한 자기 삶에 대한 주체적 책임과 앎의 과정에 대한 능동적 관심을 안겨 주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사실은 바로 이것이 비단 철학 교육이 아니라 우리가 국가적 차원에서 행하는 모든 교육의 지향점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즉 철학 교육은 교육의 완성이다. 그리고 이런 철학 교육이 없이 여태껏 진행되어 온 우리나라의 현대 교육은 그 어떤 완성도 경험하지 못한 미성숙 교육의 연속이었다고.
홍윤기 philoedu1985@gmail.com
동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철학교육학회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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