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이거 하나 깎아줄 수 있어?

2006년 3월 어느 날, 평소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던 아내는 외국인테리어잡지에 소개된 산타클로스 소품을 보고 나에게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을 건넸다. 나는 형식적인 대답을 한 후 보고 있던 TV 프로그램으로 이내 다시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 퇴근을 하던 나는 아파트 단지 앞 길거리에서 우연히 나무 한 토막을 발견하게 됐다. 가로수 정비를 하면서 잘려진 나무토막이었는데 순간 아내가 얼마 전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주워온 나무토막은 초등학생 시절 사용했던 조각도로 어설프게 다듬어졌고,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목각인형이 되었다.

 아내는 그 인형에 손수 물감을 칠해서 거실 장 한 켠에 놓아두었고 우리는 그걸 보면서 정말 기뻐했다. 그 후 나는 아내의 권유로 몇 개의 나무인형들을 더 만들었고, 아내의 과도한(?) 칭찬에 힘입어 점차 목각인형 만들기에 재미를 붙였다.

그러던 2008년 어느 날, 목각인형 만들기 교재구입을 위해 들른 미국의 어느 한 잡지사 사이트에서 산타클로스 목각인형 콘테스트에 관한 공모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웬걸, 크게 기대하지 않고 참가한 이 대회에서 덜컥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회사사무실에서 이메일로 수상소식을 접한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출품했던 산타클로스 인형에 칠을 했던 아내에게 곧바로 전화를 걸어 수상소식을 알리자 아내는 이내 믿지 못하는 눈치였고 몇 번의 거듭된 얘기 끝에 결국 아내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그 후 우리는 국내외 목각인형대회에서 몇 차례 더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고, 이런 결과는 우리 부부에게 큰 자신감과 함께 목각작업에 대한 무한 열정을 갖게 해주었다.

이렇듯 오븐 속의 빵처럼 부풀어 오르던 우리의 열정은 말미암아 또 다른 목표를 갖게 했는데, 2010년 8월, 우여곡절 끝에 나와 아내는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던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구입한 지 얼마 안 된 아파트를 담보로 해서 유학자금을 마련했다. 가족과 지인들의 많은 걱정과 우려 속에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진정 원하는 것을 따르기로 했다. 3년간의 유학생활은 우리에게 기대 이상의 것들을 경험케 했다. 또한, 예술과 공예적인 측면에서 나무의 또 다른 가능성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경험과 발견은 앞으로 우리 부부의 작업에 있어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가끔 아내가 내게 말을 건넸던 2006년의 그 날을 떠올리며 만일 그때 아내가 그 산타클로스 인형을 만들어달라고 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누군가의 사소한 말 한마디가 다른 이의 운명을 180도 바꿀 수도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적어도 나에겐 100% 공감되는 말이다. 특히 아내의 칭찬은 내 손의 칼을 춤추게 한다. 이렇게 나도 몰랐던 열정과 재능을 찾게 해준 아내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이다.

산림자원이 풍부한 스웨덴은 그만큼 목공예가나 나무 관련 예술가가 많다. 그렇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까지 생계유지를 위해 본인들의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일을 병행하며 살아간다. 마트에서 창고 정리하기, 식당주방에서 설거지하기, 낡은 집의 유리창틀을 칠해주거나, 공동묘지의 잡초 뽑는 일 등등. 그중 스웨덴 북부의 한 기차역에서 열차의 진입을 알리기 위해 깃발 흔드는 일을 15년간이나 해온 목공예가도 있었다. 지금은 스웨덴 최고의 목공예가 중 한 명인 그는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기 위해 기꺼이 해야 할 일을 했었다고 한다.

얼마 전 우리는 3년간의 학업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한 지인이 무상으로 내어준 집에서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호구책 마련을 위해 우리 역시 아직까진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의 정신적, 육체적 고달픔은 감수해야겠지만 이 역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한 과정이기에 감당할만하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에 열정을 갖고 꾸준히 매진한다면 그것은 어느 순간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훗날 어느 한적한 산골 집 한 켠에 앉아 한가로이 나무를 깎으며 늙어가는 우리 부부의 모습을 떠올리면 입가에 빙긋이 미소가 지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