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있는 에세이 _ 색, 기억의 통로 _ 하태임

그림이 있는 에세이

색, 기억의 통로

하태임, 화가

세상에는 무수한 색들이 넘실거린다. 인간이 색을 구분하고 식별할 수 있는 일은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 수많은 색을 잡아내기 위해 가장 단순한 그리기의 행위인 붓의 넓이만큼의 선으로만 형태를 제한하고 있다.

어떤 것을 묘사하거나 여러 감정을 표출하는 감각적인 우연의 효과들을 배제한 채 몸을 축으로 만곡의 색띠를 만들어 내기를 십수 년…. 사람들은 내게 지루하지 않으냐고 묻기도 하지만, 인간의 다리를 갖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마녀에게 내어준 인어공주처럼 색을 찾는 여행은 매일의 기도와 같이 나를 깨어나게 하고 거듭 되살아나게 한다.

컬러밴드, 색띠라고 명명하는 나의 시그니처 형태가 고착화되고 색들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화려한 원색들에 매료되어 있었다. 저마다 강한 원색이 스스로의 자태를 앞다투어 뽐내듯 흥겨운 파티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었다. 나의 삼십 대와 사십 대 중반까지 색을 잘 쓰는 기준이 보색 대비를 잘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거침없이 색들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나의 내면의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힘들고 고단한 나를 마주보고 가만히 내 마음의 풍경에 귀를 기울였다. 내 그림들을 뒤돌아보니 숨 가쁘게 달려온 나의 시간이 서글프게 느껴졌다. 호흡을 하듯 차례로 올려진 붓질 사이에 생기는 색 공간을 들여다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색의 겹침과 반복에서 나오는 차이의 공간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비로소 색조가 투명해지고 잠잠해진다.

전혀 다른 성질의 색과 색이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진다. 때론 긴장되고, 어느 지점에서는 행복하고, 그리고 어느 순간에서는 애절하기도 하다. 각각의 캔버스에는 가사가 없는 클래식 음악처럼 색의 선율이 흘러넘친다. 색은 상징적, 역사적 의미를 뛰어넘어 개인의 역사와 관계되어 있다. 타인에게는 처절할 수 있는 기억의 색이 나에게는 위로의 색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각자의 경험에서 색에 대한 인상과 기억이 결정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블루’는 그리움이다. 꿈과 이상을 향한 호기심이며 미지의 곳을 여행할 때 느끼는 설레는 마음이다. 너무 높은 이상을 향한 마음으로 인한 고독의 색이기도 하다. 흔히 우울함을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깊고 푸른 하늘과 바다, 뜨거운 여름 짙은 초록색 사이에 얼굴을 내미는 달개비꽃과 같이 청량감을 주는 희망의 색이다.

‘핑크’는 화해와 너그러움의 색이다. 깊고 쓸쓸한 겨울을 살아내게 하는 핑크는 따스하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버리는, 다시금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색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사춘기에 이르면유년기에 사랑해 마지않던핑크를 유치하고 여성성을 드러내는 색이라고 외면하게 된다. 하지만 인생의 거친 풍랑을지나고 내면을 마주하고서야 만난 자신의 비뚤어진 고집스러움에 용서를 구하는 색이다.

‘노랑’은 찬란한 기억, 온화함과 기쁨을 담고 있는 빛줄기의 색이다. 찬란한 기억과 치유의 에너지, 이 생명의 에너지 가득한 노란 색은 내 기억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연두(Yellow Green)’ 는 초여름의 싱싱함, 그리고 휴식과 정신적 평화로 감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