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희의 窓 _ 다시 립스틱을 바르고 _ 박성희

박성희의 窓-42회

다시 립스틱을 바르고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

쏜살같은 시간의 흐름을 다 쓴 화장품 병이 알려줄 때가 있었다. 군대 간 청년이 국방부 시계를 보면서 시간을 느끼듯, 직장 전선에서 매일 정돈된 낯으로 사람을 대해야 하는 젊은 커리어우먼 시절, 나는 화장품 병이 비어가는 것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느끼곤 했다. 새로 뚜껑을 연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바닥을 보여 가는 로션 병을 거꾸로 세워 놓으며, 혹은 평소 즐겨 쓰던 아이 라이너 잉크가 흐려지거나 좋아하는 색의 립스틱이 닳아 없어지는 걸 보면서 또 한 움큼의 시간이 흘러간 걸 깨닫곤 했다.

뭐든지 계속 쓰면 언젠가는 사라지는 게 엄연한 법칙이다. 매일 바르는 양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얼굴이 특별히 커진 것도 아닌데, 정해진 용량의 화장품이 바닥을 드러내는 건 단순한 시간의 흐름에 따른 조화다. 시간에 비례해 사라지는 게 비단 화장품만은 아닐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화장품은 나의 사회생활을 양으로 환산해 말해주는 일종의 모래시계 같은 존재였다. 한참 나이가 든 후 문득 나는 그동안 내가 바른 립스틱을 다 모으면 ‘립스틱 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우스운 상상을 한 적도 있다.

화장대 위의 화장품이 모두 일정하게 소비되는 건 아니다. 세수할 때마다 쓰는 스킨이나 로션은 빨리 사라지지만 띄엄띄엄 바르는 색조화장품류는 오랫동안 화장대를 지킨다. 유통기한도 없는 화장품은 그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화장대 구석을 지킨다. 그렇다고 쉽게 갖다 버리기도 어려운 게 화장품이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아직 내용물이 있는 화장품은 버리기가 쉽지 않다.

기술이 발달한 요즘은 화장품도 종류와 용도에 따라 엄청나게 전문화되고 다양해졌지만, 어린 시절 엄마 화장대 위의 화장품은 별로 많지 않았다. 크림과 분과 립스틱과 눈썹용 검정 펜슬 정도였던 것 같다. 세수를 마친 엄마가 외출 준비를 위해 화장대 앞에서 뽀얀 분 냄새를 풍기며 눈썹도 정리하며 화장하시던 모습을 옆에 붙어 앉아서 신기한 듯 바라봤던 기억이 새롭다. 도톰하고 예쁜 입술을 가졌던 엄마는 마지막에 작은 솔로 입술을 쓱쓱 바르셨는데, 그러고 나면 딴 사람처럼 화사해졌던 기억이 난다. 역시 화장의 완성은 립스틱이다.

뉴스를 보니 코로나 팬데믹으로 뷰티 시장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고 한다. 재택근무나 집콕, 마스크 착용의 일상화로 메이크업을 하는 일이 줄어들었고, 특히 마스크에 묻어나는 색조 화장품 수요가 크게 감소했다는 소식이다. 소비자후생지수에 따르면 수입 화장품 중 고가의 향수만 좀 늘었을 뿐 다른 화장품은 줄었다고 한다. 발 빠른 업자들은 마스크에 묻어나지 않는 립스틱을 개발하거나 화장품이 묻어나지 않는 마스크를 만들어 내놓기도 했지만 대면 일상이 줄어든 상황에서 화장품 소비가 예전과 같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립스틱은 좀 특별하다. 우선 나도 마스크를 벗을 상황을 대비해 늘 립스틱을 갖고 다녔고, 줌(zoom) 회의를 할 때는 립스틱을 빼놓지 않고 발랐다. 여기에 덧붙여 작은 사치로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이른바 ‘립스틱 현상’으로 인해 코로나 기간에도 립스틱 소비는 크게 줄지 않았다고 한다. ‘립스틱 현상’이란 불경기에 립스틱이 많이 팔리는 현상을 말한다.

유명 화장품 브랜드인 에스티 로더는 ‘립스틱 지수’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예를 들어 2001년 9.11 테러 이후 립스틱 판매량이 급증했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후에도 립스틱이 많이 팔렸다고 한다. 유례없는 불경기를 겪은 지난 팬데믹 기간, 미국 화장품 기업들은 예상을 깨고 증권사들의 추정치를 웃도는 좋은 실적을 발표했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NPD그룹에 따르면 지난해 1분기 미국에서 입술용 화장품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8%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