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펼쳐진 물 없는 바다 사하라 사막, 

낙타의 행렬, 꽃, 태양, 흑인들의 카니발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 왔던 나의 꿈이지만

뭇 현대인이 그리워하는 原始에의 鄕愁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가끔 아프리카의 지도가 월면에

부각된 꿈을 꾸고 무서워서 가슴 죄며 외할머니

품 안으로 기어들어 갔었다.

아프리카는 왠지 나와 인연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천경자, 原始에의 鄕愁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존재하는 천경자 화백(1924~2015)의 예술 언어는 찬란한 생을 고귀한 삶에 이르게 하는 실존적인 상태이다. 내면의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이 매력적인 언어는 오래된 곳으로부터의 전언이며 먼 곳으로의 향수이다. 원시(原始) 혹은 시원(始原)에의 노스탤지어. 

인생의 소실점을 오롯이 관조하며 캔버스 위에 축조한 단어와 문장, 그리고 문장 부호와 여백은 그녀만의 명료한 빛과 색으로 여인의 삶을 빚어낸다. 전 세계를 여행하며 마주하게 된 삶의 단상과 행간을 기록한 여행 풍물화에는 여인들의 초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 비일상성 안에 살아 숨 쉬는 특유의 여성성은 독보적인 여성상으로 발화된다. 한 시대, 한 시절 속에 머물다 간 누군가의 시간은 그렇게 화폭 속으로 밀물처럼 밀려든다. 

본지 7월호 표지화인 <초원>(1978)은 광활한 아프리카 초원에서 공생하는 얼룩말, 치타, 코끼리, 사자, 새를 통해 원시적 생명력을 강렬한 어조로 표현했다. 특히 코끼리 등 위에 나체로 누워있는 한 여인은 작가 자신을 상징하고 있는 듯한데, 한순간에 시선을 압도하며 몰입하게 만든다. 그림이 곧 생이며 삶이었던 그녀와 조우하는 순간이다. 

시절을 품고 시대를 넘은 그녀는 전통적인 한국화의 질서 너머로 새로운 예술 세계를 구축해왔다. 독창적인 화법(畵法)과 화법(話法)으로. 누구보다 주체적이고 열정적인 태도로 미적 사유를 펼쳐온 것이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시인 묵객으로서 그림뿐만 아니라 수많은 에세이를 통해서도 창조적 자아의 외연과 내연을 확장해온 그녀는 자주 “미완성의 작품, 미완성의 인생”이라는 말로 삶과 예술을 역설했다. 

“한 인간의 인생과 예술은 정과 미, 무욕이라는 세 가지 신의 가호가 있어야 향기로운 생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진리인 듯이 나는 굳게 믿고 살았다. 어쨌든 이 세 신들이 뿌려주시는 빛을 받은 사람은 축복받은 예술가라고 보고 싶다.”*

내면의 빛과 색을 찾아 떠나온 기나긴 여정은 ‘천경자’라는 예술가의 자유를, 자유의 예술가를 우리에게 정면으로 비춰준다. 평생 예술의 독행자(獨行者)이자 꿈의 동행자로서 늘 새 길을 내고 첫길을 열었던 그녀는 환상적인 언어로 고독과 한(恨), 애상과 비애, 그리고 꿈의 서(序)를 써 내려왔다. 스스로 체감한 것을 체화하는 예술을. 

지금, 여기, 다시 그녀의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다. 

글. 김신영 편집장 

*천경자, <꽃과 영혼의 화가>(2006), 랜덤하우스중앙(주), p.118

1924년 전남 고흥 출생, 2015년 뉴욕에서 사망.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근무. 첫 개인전(1946년). 광주사법학교 재직, 6.25동란 이후 뱀에 매료되어 최초의 뱀 그림 <생태> 제작.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1954~1974년). 5월 문예상 본상(1964년), 3.1문화상(예술 부문)(197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1979년) 등 다수 수상. 다수의 개인전.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등 다수의 수필집 발간.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1997년).

[출처] 월간에세이 Essay
ⓒ 본 콘텐츠는 발행사에서 제공하였으며,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재배포 등을 금합니다.